임명 땐 미국 역사상 ‘첫 女 연준 의장·재무장관’ 기록
시장 충격 없이 기준금리 5번 올린 연준의 ‘작은 거인’
‘중앙은행의 고용 투수 역할’ 강조…美 경제 호황 이끌어
남편 그늘에 가려졌다가 클린턴-오바마-바이든 선택 받아
'아이큐(IQ)만큼은 거대한 최단신(152㎝) 경제 대통령.'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내각 첫 재무장관으로 유력하게 검토중인 재닛 옐런 전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에겐 이런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진에 허덕이던 지난 2014~2018년 미국 연준 의장으로 재직하며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 옐런은 코로나발(發) 경제 위기에서 또한번 미국을 구해낼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1위 경제대국 미국의 재무장관은 행정부 장관 이상의 무게를 가진다. 말 한마디로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요직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미국의 추가 경기부양책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경제 회복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옐런이 재무장관이 되면 미국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번 남긴다. 여성으로서 첫 연준 의장을 지낸 데 이어 재무부 231년 역사상 첫 여성 장관이고,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 출신이 중앙은행과 재무부 수장까지 지낸 최초의 사례가 된다.
바이든이 옐런을 고른 건 3가지 측면에서 최선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워싱턴 정가에서 실력으로 인정 받은 인물을 내세움으로서 상원 통과 가능성을 높였다.
옐런이 재정지출 확대와 금융 완화 정책에 적극적인 케인지언(케인스학파·정부의 적극적 시장개입 옹호)이라는 점에서 월가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고, 그가 소득·성 불평등과 기후 변화 대응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민주당 진보 진영 요구에도 화답했다고 볼 수 있다.
옐런이 지난 2017년 연준 의장직을 내려놓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백발의 머리스타일을 본뜬 가발을 쓴 시민단체 회원들이 "옐런을 재임명하라"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단체는 옐런이 추진하던 금리 인상에 반대했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옐런 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준 의장으로서 옐런의 가장 큰 업적은 4년이라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일으키지 않고 기준금리를 5번이나 올렸다는 것이다. 옐런의 전임자인 벤 버냉키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려고 전례없이 낮춰 놓은 금리와 무제한 채권 매입을 거둬들이는 테이퍼링(Tapering)이 그녀가 맡은 최대 숙제였다.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금리를 다시 올리는 순간 시장이 패닉에 빠지고 경제위기가 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동시에 연준 내부에선 더 빨리 긴축 정책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매파(통화 긴축 옹호)들이 옐런을 압박했다. 옐런은 2015년과 2016년 한차례 금리를 인상한 뒤 숨을 고르다 2017년 세 차례 올렸다. 이 과정에서 시장에 충분한 신호를 줘 '긴축 발작'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준 의장에게 4년은 짧은 임기다. 통상 미 대통령은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통화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준 의장을 재신임해 8년 임기를 채우게 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한 후 제롬 파월 의장을 지명했고 옐런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의장직을 내려놓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트럼프 행정부는 옐런의 덕을 톡톡히 봤다. 옐런이 금리를 안정적으로 인상하지 않았다면 파월이 코로나에 대응해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는 일은 불가능했다.
옐런 재임기간 실업률은 2014년 6.7%에서 2018년 4.1%로 떨어졌고 경제성장률은 1%대에서 2.7%로 상승했다. 퇴임에 맞춰 워싱턴포스트(WP)가 월가 이코노미스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 그녀는 'A학점'을 받았다.
◇ ‘스타 경제학자의 아내’에서 ‘연준 첫 女 의장’으로
옐런은 1997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무명에 가까운 경제학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영재로 유명했고 탁월한 예측 능력과 연구 성과를 보유했지만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남편 조지 애커로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중점 연구분야는 실업 문제와 임금이었다. 1980년대 초 보모와의 임금 협상 경험을 토대로 "보육의 질 저하를 우려한 부모들이 보모에게 시세보다 높은 임금을 지급하듯, 기업들도 업무의 질 하락을 우려해 핵심 인력의 임금 삭감 대신 잉여 인력의 구조조정을 택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옐런은 평소 ‘중앙은행도 실업 문제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소신이 그가 미국 역사상 첫 여성 연준 의장이 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옐런은 1994년 연준 이사로 합류한 이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통화 완화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물가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연준이 실물경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거세지던 상황이었다.
연준에서 옐런은 뛰어난 예측 능력으로 유명했다. WSJ는 2009~2012년 연준 주요 임원들의 경제 전망 발언과 그 정확도를 분석한 결과 옐런이 1점 만점에 0.52점을 받아 0.45점을 받은 윌리엄 더들리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녀를 지명하면서 "주택시장 거품과 금융 부문의 과잉 문제, 주요 경기 침체의 위험성에 대해 일찍이 경보를 울렸다"고 설명했다.
복잡한 경제 현상을 데이터를 근거로 단순 명료하게 설명하는 데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스승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은 1997년 인터뷰에서 옐런에 대해 "복잡한 주장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 천재적"이라고 말했다. 옐런이 연준 이사였을 때 의장을 지냈던 앨런 그린스펀은 "그녀는 상당히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학문적인 현주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연준 전임 총재들에 비해 상냥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조직 내부의 소통 능력을 훨씬 유연하게 바꿨다는 평도 받는다. 2004년 샌프란시스코 연준 총재로 임명됐을 땐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매일 식사한 일화로 유명하다. 당시 직원들이 총재와 자유롭게 토론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옐런의 등장과 함께 깨졌다. 비즈니스위크는 "미국 경제의 외진 곳이었던 샌프란시스코가 거시경제의 중심지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가까운 지인들이 보는 옐런은 '강심장'이다. 옐런과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를 지낸 앤드류 로즈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1989년 샌프란시스코에 강력한 지진이 덮쳤을 때 벽과 바닥이 흔들릴 때도 옐런은 울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채 상당히 침착하게 책상에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옐런은 ‘페미니스트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공개적으로 여성 인권신장 운동을 주도한 적은 없지만 존재 자체로 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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